서론
서정주 시인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는데,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계약서 번역입니다. 계약서 번역은 무미건조한데도 부담은 많이 됩니다. 반면 판례 번역은 스토리도 있고, 고급스러운 전문 용어와 법리, 우리나라와 다른 시스템까지 엿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 선호하고 있습니다. 문맥과 논리의 흐름까지 고려하여 신중하게 용어를 선택해야 해서 난이도는 계약서의 몇 배나 되는데 건수는 적어서 기회가 오게 되면 아무리 스케줄이 바빠도 욕심내서 달려들곤 합니다.
최근에 운 좋게도 Motion to Dismiss와 관련된 대법원 판례를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Motion to Dismiss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시스템인데요, 가뭄에 콩 나듯 판례를 구경할 수 있는 저로서는 연구 자료가 부족하여 오랫동안 고심했던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Motion to Dismiss에 대한 간략한 설명
Motion to Dismiss란 당사자가 법원에 ‘소송을 일축한다’는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로 소송을 제기 당한 피고가 원고의 소장에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더 이상 소송을 진행하지 말아 달라고 법원에 제출하는 신청입니다.
관할권 부재, 원고의 주장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 절차적 결함 등을 이유로 제기하는데, 이걸 법원이 받아들였을 때 각하라고 해야 할지 기각이라고 해야 할지, 그 동안 자료가 별로 없어 고민해 왔던 거죠.
각하와 기각
우리나라에서는 원고의 소 제기가 소송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실질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돌려보내는데, 이를 ‘각하’한다고 표현합니다. 소송요건에는, 대상적격, 당사자능력, 소의 이익, 제소기간, 재판관할 등이 있습니다.
소송요건을 모두 갖춘 적법한 소 제기인 경우 법원이 그 사안을 들여다보고 판단을 하게 되는데, 살펴보아도 청구원인이 이유 없을 때 ‘기각’ 판결을 합니다.
영미법상 Motion to Dismiss를 제기할 주요 근거로는, 관할권 부재, 청구 원인 부재, 소송의 시효 만료, 소송 요건 불충족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청구 원인 부재’의 경우, 이걸 각하라고 해야 할지, 기각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었습니다. 원고의 청구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Motion to Dismiss를 제기할 경우에, 즉 원고의 주장 자체가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거나 충분한 사실적 증거가 없다고 이를 제기한 경우에는 법원이 어느 정도 사안을 판단한 것인데, 그러면 ‘기각’이라는 용어를 써야 하는 건 아닌가…
Motion to Dismiss의 근거
주요 근거에 대해 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관할권 부재는 해당 법원이 당해 사건을 다룰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인정되면 ‘각하’에 해당합니다.
소송 시효 만료는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이 이미 지났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인정되면 ‘각하’에 해당합니다.
소송 요건 불충족은 절차적 결함을 주장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원고가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할 때 인정되면 ‘각하’에 해당합니다.
문제의 청구 원인 부재는 원고의 청구가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단순히 논리적으로 법의 판단이 필요한 사실을 기술하는 것을 넘어, 상당히 구체적으로, 위 판례에서는 (i) 또는 (ii) 중 하나를 증명하도록 요구하고 있어, Motion to Dismiss 단계에서 법원이 어느 정도 들여다보고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청이 인정될 경우 ‘기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위 판례를 보면 원고 청구의 법적 근거가 부족하냐 안 하냐를 판단할 때 본안판단에서 심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합리적 추론이 가능할 만큼 주장했냐 못했냐 정도만 검토해서 원고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소 제기 자격이 있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신청이 인정될 경우 ‘각하’에 해당한다고 못 볼 바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송요건에 대한 판단은 법원의 직권이라서 당사자가 신청한다고 해서 판단하고 신청하지 않았다고 해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영미법 체계에서는 신청해야만 법원이 고려하는 것이고, 이 단계에서의 증명 정도는 본안판단에서 심리하기 위해 요구하는 정도는 아니며, 다른 근거들의 경우에 받아들여지면 ‘각하’라는 표현이 어울리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각하’를 사용해도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Motion to Dismiss 판결문에서는 원고가 어떠어떠한 점을 show 해야 한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법률 문서에서 show는 단순히 보여준다는 것이 아니라 ‘입증하다’ 또는 ‘증명하다’의 뜻입니다. 단순히 주장을 적시하는 것이 아닌, 법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수준의 증거나 사실관계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소장 심사 단계에서 입증의 정도는 정식 재판에서 요구하는 완전한 증명이나 입증까지는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소명하다’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이 또한 아직 자료가 부족하여 고심하는 중입니다…)
심급제도와 Motion to Dismiss
우리나라도, 영미법 국가들도, 대부분 3심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1심(지방법원) → 2심(고등법원) → 3심(대법원)
미국: 1심(지방법원(District Court)) → 2심(항소법원(Court of Appeals)) → 3심(연방 대법원(Supreme Court))
영국: 1심(하급법원(Magistrates' Court 또는 Crown Court)) → 2심(고등법원(High Court)이나 항소법원(Court of Appeal)) → 3심(대법원(Supreme Court))
예외적으로 1심으로 끝나거나(소액사건, 선거소송) 2심으로 끝나는 경우(가사 사건, 행정 사건)가 있고, 파기환송을 통해 다시 심리되어 4심 또는 5심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Motion to Dismiss는 소송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한 도구로, 소송 초기 단계에서 사건을 정식 재판 없이 끝내 달라는 법적 요청이고, 이 절차는 재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법원이 한 Motion to Dismiss 결과에 대해 불복하는 당사자는 상급법원에 상소할 수 있고, 중요한 법적 문제나 헌법적 해석이 필요한 경우에는 대법원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6심이나 마찬가지인데, 정식 재판을 해서 대법원까지 갔다가 파기환송되면 7심, 8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교 개념 ‘상소제도’
심급제도의 유사한 개념으로 상소제도가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단계의 법원에서 순차적으로 심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심급제도라면, 상소제도는 하급 법원의 재판(판결, 명령, 결정)에 대해 불복하여 상급 법원에 판단을 요청하는 절차를 의미합니다.
심급제도가 법원의 재판 체계에 대한 구조적 개념을 제공한다면, 상소제도는 이 구조 내에서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검토되는지를 정의합니다. 사법 시스템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다는 데에 목적을 같이하고 있습… 네, 그만하겠습니다. 번역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이렇게까지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죠...
번역가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용어에 대해 설명해 드리자면, 심급제도, 상소제도와 관련하여 헷갈리는 용어로는 항소, 항고, 상고, 상소가 있습니다.
항소는 지방법원의 제1심 판결에 불복하여 제2심 법원에 상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항고는 '판결'이외의 '결정'이나 '명령'에 대해 상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원이 한 명령 또는 결정이 법률 등에 위반되었는지를 심사합니다. 상고는 제2심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급법원의 법령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심사합니다(비약상고가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제외). 뒤에 ‘소(訴)’자가 붙으면 사실심+법률심으로, ‘고(告)’자가 붙으면 법률심으로 외우면 쉽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황과 법원에 따라 항소, 항고, 상고 등 용어를 달리하지만, 영미법에서는 대부분 "appeal"이라고 표현합니다. "to appeal to the Court of Appeals" (항소 법원에 항소하다) 또는 "to appeal to the Supreme Court" (대법원에 상고하다) 등 상황으로 표현하므로 글의 맥락을 보고 단서를 찾아 항소냐 상고냐, 올바르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단서가 없거나 판결문이 너무 복잡하여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모든 의미를 포괄할 수 있는 상위 개념인 ‘상소’를 사용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번역한 판결문의 간략한 내용
지배주주인 회사와 자회사 간의 회사분할의 공정성에 대해 소수주주들이 제기한 파생소송(대표소송)에 관한 건입니다. 쟁점은 지배주주 거래에 적용되는 심사 기준이 완전한 공정성(entire fairness)인지 경영판단심사(business judgment review)인지 여부 및, 거래를 승인한 특별위원회가 독립적이었는지 여부였습니다.
경영 판단 심사는 회사와 지배주주에게 유리한 완화된 심사이고, 완전한 공정성 심사는 강화된 심사입니다. 경영 판단 심사를 적용 받기 위해서는 MFW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독립적인 특별위원회의 승인과 소수주주 과반수의 찬성 투표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심에서는, 경영 판단 원칙이 적용되는 사안이라고 보고, 그렇다면 MFW 요건을 갖추지 못했음을 원고가 증명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i) 특별위원회의 50% 이상이 이해관계가 없지도 독립적이지도 않았음” 또는 "(ii) 특별위원회의 소수가 특별위원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거나' 또는 '지배했음’ 중 하나를 증명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위원회는 독립성을 갖추었다고 판단, Motion to Dismiss를 인용하고 원고의 소송을 각하했습니다. (원심의 판단은 위원회의 과반수만 독립적이면 된다는 점을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소수주주 축출이 목적이든 아니든 지배주주가 거래의 양측에 서 있는 거래에 적용되는 심사 기준은 완전한 공정성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지배주주는 본질적으로 강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지배주주가 회사와 거래하고 비배분적 이익을 받는 경우에는 자신의 지배력을 무력화할 필요가 있는데, 특별위원회가 지배주주에 충성하는 위원으로 구성되면 지배주주의 영향력은 무력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MFW 요건에서 특별위원회의 독립성을 요구하는 의미는 위원회의 과반수만 독립적이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습니다.
따라서 원고의 소장은 특별위원회 전체의 독립성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구체적인 사실을 기재하여 소송을 진행할 만큼 적절히 소명하였으므로, 원심이 경영 판단 원칙을 적용하여 Motion to Dismiss를 인용하고 소송을 각하한 판결을 대법원이 뒤집었습니다.
마무리
Motion to Dismiss에는 소송요건을 갖추지 못하여 ‘각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있고, 청구의 법적 근거가 부족한지 사안을 일부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기각’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이는 법원의 직권 판단 사항이 아니고 피고의 신청이 있어야 판단하므로 ‘기각’이라는 표현과 어울리는 면도 없잖아 있지만, 이 단계에서는 본안 판단에서 요구하는 만큼 증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각하’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Motion to Dismiss가 인정되면 해당 사건은 정식 재판 없이 종결되고 Motion to Dismiss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건은 정식 재판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런 측면에서 소송의 자격 즉, 소송을 계속 진행할지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저는 Motion to Dismiss가 인정되는 경우 소송을 ‘각하한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결론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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